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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영웅 인발
구분 역사인물
내용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영웅(英雄) 인발(印潑)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적을 무찌르지 않고 어찌 백성이라고 도망 다니는 선비들께「당신은 문신이요, 문신은 편안할때 책을 벗삼야 하지만 국난(國難)이 닥쳤을때는 책을 덮어두고 창칼을 들어야하오. 아니 문신이라고 산중으로 피해 다니면 누가 당신을 선비라고 우대 하겠소 선비는 비겁하지 않는 법이요 제발 비겁한 사람이 되지마오」그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한 선비의 책을 땅속에 파묻도록하고 「다음에 이곳에 찾아오시오. 그때까지 책은 썩지 않을것이요. 우선 나라를 먼저 지킵시다.」그는 선비를 이렇게 타일러서 국난을 구국의 일념에서 싸우도록 타이르고 그도

선비와 함께 왜적을 무찌르는데 앞장 섰었다.
왜군이 아무리 조포라는 무기로 무장을 하였어도 인발(印潑)이 이끄는 이끄는 군사에게는 당하지 못하였었다. 그는 날쌘 군사를 기백명 거스리고 있었다. 항시 적을 후방에서 괴롭히니 왜적들도 싸움에 패하면 「인발의 군사냐?」하게끔 크게 공을 세웠기에 임진왜란(壬辰倭亂)때 2등공신으로 전공을 빛낸 사람으로 왕(王)으로부터 치하를 받은 충신이다.

그는 충남(忠南) 보령시(保寧郡) 청소면(靑所面) 죽림리에서 거주 했었다. 왜적이 물러가자 그는 선전관이 되었었고 전운을 잊은듯 잠시 집에 와있을 때 이번에는 북쪽에서 청(靑)나라 군사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 그길로 한양(漢陽)으로 올라갔다. 벌써 청나라 군사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한양(漢陽)으로 진격중이어서 그는 군사를 모으라고 하였으나 한양의 인심이 소란하여 군사를 모을 수가 없어서 그 길로 전라병영으로 말을타고 내려갔다. 그래서 전라병사 김준용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오게 되었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한양에 들어서려할 때 벌써 청의 군사가 한양을 점령한 후였다.

인조(仁祖)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진을치고 있어서 강을 건너고 산성까지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는「백성은 죽어도 한나라의 왕과 죽엄을 같이해야 하거늘 어찌 여기에서 기다릴수 있는가?」하고 밤을 이용하여 적을 무찌르며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진을 친 우리군사들의 사기는 충천되어 있었다. 비록 청나라 군사가 대군을 이끌고 산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우리군사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인발(印潑)은 탁상공론하는 선비들 틈에 끼느니 차라리 한놈이라도 적을 무찔러야겠다고 매일같이 야음을 타서는 적진으로 뛰어가선 적을 무찔렀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군사들은 그를 따랐다. 더구나 산성에서 웅거하여 왕을 지키는것도 좋지만 적을 무찔러서 적을 몰아 내는것도 한나라 군사로서 충성을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루는 한낮에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한손에 칼을들고 한손으로는 화살을 들고 가까이 오는 적군에게 힘있게 화살을 던지니 그 화살에 맞고 쓰러지지않는 군사가 없었다.

말을 잘탔으며 싸움솜씨가 뛰어나 그가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서 화살을 던지니 많은
군사로 대치 하고있던 청(靑)나라 군사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인발(印潑)은 물러가는 군사들을 뒤쫓았다. 그리곤 용감하게도 덤벼드는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적진으로 깊숙히 쳐들어갔다. 우리군사의 대담한 유격에 놀랜 청(靑)나라 군사들은 좌측과 우측에서 이번엔느 대군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인발(印潑)은 그때 적진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가자 청(靑)나라 군사들도 단숨에 그를 포위해 버렸다. 허나 주저하지않고 그는 칼을 휘둘렀다. 그러다가 그의 몸으로 일제히 적의 화살이 날라오니 그는 수십게의 화살을 맞고 멈짖섰다. 그러나 죽을때까지는 싸워야한다는 신념에서 크게 소리치며 적진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서 적을 죽이며 쓰러졌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유격의 장수 인발(印潑)은 무참하게 화살을 맞고 전사한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듣고 인조(仁祖)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인발(印潑)이가 죽다니…」하고 눈물을 글썽하였다니 그의 충성을 짐작할만도하다.

그가 죽자 그후 그로인해 선비의 길에서 창칼을 들은 선비가 광교산 종과함께 시체를 찾으러 갔을 때 그의 시체는 마치 산사람처럼 기상이 늠름하고 생시의 면목과 같았다 한다.

그후 선비의 손으로 청소면(靑所面) 재정리(才井里) 재동에 묘를 쓰고 그의 충성심을 길이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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